조선 후기의 정치는 한마디로 말하면 ‘싸움의 역사’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들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다른 편으로 갈라져 끝없는 갈등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갈등을 멈추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시도가 있었다. 바로 ‘탕평’이다.

이야기는 숙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사림은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수많은 붕당이 생겨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열은 더 세분화된다. 겉으로는 학문과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점점 격해졌다.
숙종은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단순히 억누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그가 사용한 방식은 이른바 ‘환국’이다. 권력을 한쪽 붕당에서 다른 붕당으로 급격하게 뒤바꾸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으로 치달았고, 왕권은 오히려 강화된다. 우리가 잘 아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도 사실은 이런 권력 교체의 흐름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결국 부작용을 남긴다.
붕당은 더 깊게 갈라졌고,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려 한 인물이 바로 영조였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큰 사건을 겪는다. 소론 세력이 주도한 이인좌의 난이다. 이 반란은 그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이대로 두면 나라가 무너진다.”
이후 그는 강력한 의지로 탕평책을 추진한다.
그가 내세운 통치 원칙은 세 가지였다. 붕당을 경계하고, 사치를 경계하며, 방탕함을 경계하는 것. 특히 붕당 정치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각 붕당의 온건한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완론 탕평’이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균형 잡힌 정책이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갈등의 뿌리를 완전히 없애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정조였다.
정조는 영조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는 갈등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 붕당의 핵심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을 유도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합의를 만들어가며, 최종적으로는 왕이 방향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의 탕평을 ‘준론 탕평’이라고 한다.
정조의 정치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갈등을 덮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고 활용하면서 국가 운영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력 역시 영원하지는 않았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은 다시 권력의 균형을 잃는다. 안동 김씨 같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탕평의 이상은 점점 무너져간다.
결국 탕평은 실패한 정책일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극단으로 치닫던 붕당 정치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던, 그리고 권력을 나누고 조정하려 했던 매우 현실적인 시도였다.
조선 후기의 정치가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나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탕평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장 치열한 고민의 결과였다.